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여왕(스코틀랜드) (문단 편집) === 잉글랜드로의 도피 === 결국 메리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위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하여 아들에게 양위했으며, 이에 당시 막 돌을 지난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고[* 참고로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는 내리 3대가 아주 어린 시절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는 부왕 [[제임스 4세]]가 전사하는 바람에 만으로 2살이 되기 전에 즉위했고, 메리는 생후 6일만에 제임스 5세가 사망해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1살 무렵에 어머니가 폐위당하자 즉위했다.] 잉글랜드에 망명해 있던 메리의 이복오빠였던 모레이 경이 돌아와서 시아버지 레녹스 백작과 함께 [[섭정]]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복오빠 모레이와 시아버지 레녹스 백작은 귀족들간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반대파 귀족들한테 암살된다.] 이때 모레이와 귀족들은 메리와 한 약속을 깨고 보스웰과 메리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의회에서 공개한 것은 물론, 이 편지들의 사본을 외국 궁정에까지 보내 메리가 다시 왕권을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메리는 보스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호수 속에 있는 섬에 세워진 로클레벤 성에 감금되는데, 치욕스런 감금 생활의 충격으로 결국 [[쌍둥이]]를 유산하고 만다. 그러나 메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한 뒤 측근인 조지 더글라스의 도움으로 탈출하였으며[* 첫 번째 탈출에선 세탁부로 위장하여 배를 타다가 드러난 팔이 너무 하얘서 신분이 탄로나는 바람에 경비병들한테 들통나서 무산. 그래서 2번째엔 성 문지기 아들을 유혹(?)하여 밤중에 열쇠를 훔쳐 탈출에 성공한다.] 자신에게 협조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병사들을 모집하고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메리는 에든버러에 통첩을 보내는 한편 3천 병력을 모아서 재기하나 싶었지만, 에든버러의 섭정 모레이 백작은 이를 눈치채고는 협상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병력이 반쯤 모이자 급습하였다. 하지만 급히 모집하여 [[오합지졸]]이었던 메리의 병력들은 모레이의 진압군한테 일격에 [[개발살]]났고, 메리는 진압군에게 쫓기다가 잉글랜드로 부랴부랴 도망간다. 하지만 메리는 [[가톨릭]] 교도인데다 오래 전부터 자신이 잉글랜드의 적법한 여왕임을 주장하며 분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메리를 받아들이는 걸 영 내켜하지 않았고 그녀의 처우를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매정하게 쫓아낼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일단 메리의 망명을 받아주었지만, 메리를 매의 눈으로 주시하였다. [[미혼]]이라서 자신에게 자식이 전혀 없으므로 사실상 메리가 잉글랜드의 제1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제국|스페인]] 등의 [[가톨릭]] 국가에선 [[개신교]]([[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를 인정하지 않고 [[가톨릭]] 신자인 메리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일단 [[엘리자베스 1세]]도 군주이므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리를 스코틀랜드로 송환해 버린다면 그대로 감금되거나 처형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메리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권을 초월해서 [[왕권신수설]]이 절대적인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당연히 왕위는 [[야훼|하느님]]께서 내려준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스코틀랜드에서 '신하에 불과한 반역자들이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여왕인 메리를 내쫓은 상황'은 불경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치하 잉글랜드 자체야 이 시점에서는 이미 범유럽 개신교권의 주축중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애초에 엘리자베스 본인 성향도 전임자인 이복언니, 전전임자 이복동생과 달리 오히려 아버지처럼 종교를 정치의 목적 그 자체로 보는게 아니라 왕권강화와 정치의 수단으로 인식한 비교권주의자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본인 성향부터 이런데 애초에 잉글랜드 바로 앞마당인 네덜란드에선 바로 그 칼뱅주의자 혁명가들이 같은 적법한 봉건 군주이자 한땐 사돈이기도했던 스페인 왕실에 맞서 독립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에선 똑같은 칼뱅주의 [[위그노]] 반란군이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내전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형식적으로 같은 개신교편이던 말던간에 잉글랜드가 아예 신학적으로 일치하는 국제 칼뱅주의 세력 일원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건수만 보이면 세속 왕실 정부를 적그리스도다 뭐다 뒤엎으려고 드는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 반군을 엘리자베스는 결코 신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메리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리가 없고 엘리자베스도 그런 메리를 곱게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폐위와 관련된 상황 자체가 종파를 넘어 전제군주라면 달갑게 여길래야 여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메리를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보낼 경우 그녀의 복위를 명분으로 잉글랜드과 관계가 좋지 못한 [[가톨릭]] 국가들인 스페인과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에 국내 [[가톨릭]] 세력이 연합하면 왕권에 지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파커 대주교는 '우리의 여왕([[엘리자베스 1세]])께서는 늑대 귀를 잡고 계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메리는 망명시 땡전 한푼 없는 신세였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거처를 마련해주며 생활비를 지급했고, 비슷한 이유로 잉글랜드에 망명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세력과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을 지지를 보내며 메리를 지원하면서 어느 정도 형편이 나아졌다. 상황이 호전되자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섭정들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 "강요에 의한 서명은 인정할 수 없고, 섭정들은 여왕의 명에 따라야 한다"면서 잉글랜드 요크에서 협의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메리에게 학을 뗀 스코틀랜드에서는 전 남편 단리 경의 아버지 레녹스 백작을 중심으로 메리를 [[간통]]과 남편 살해 혐의로 조사위원회에 역고발한다. 특히 법정에서 레녹스 백작이 메리가 보스웰 백작과 나눈 편지와 애정시들을 공개할 예정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메리는 망신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재판을 포기해버렸다. 한편 보스웰 백작은 단리 경 살인 혐의로 기소돼 사형당할 위험에 처하자 1567년에 스코틀랜드를 탈출해 [[노르웨이]]로 갔으나, 거기서 체포되어 [[덴마크]]로 보내졌다. 메리를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잉글랜드에 있는 ([[엘리자베스 1세]]의 묵인 하에) 메리의 살인 공모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보스웰 백작을 스코틀랜드로 송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메리의 외가인 프랑스의 기즈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보스웰이 송환당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보스웰은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여기저기 감옥을 전전하다가 결국 덴마크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10여년간 비참한 감금 생활을 하다 급기야 보스웰은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1578년 감옥에서 41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메리는 3번째 남편이었던 보스웰의 행적을 수소문하거나 그를 구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메리의 비정함을 비난하고 있지만, 메리에게 호의적인 몇몇 사람들은 "메리가 마지 못해 보스웰과 결혼했다가 왕권을 잃었다는 증거"라면서 동정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